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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자
아가씨와, 그를 지키는 기사의 이야기.

“헤이든, 나는 이번에야말로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헤이든의 주군, 레오닐라 후작가의 아네스는
오로지 황후가 되기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몇 년 전, 황태자와의 약혼이 무산된 이후 그의 우울은 깊어졌다.
이어지는 네 번의 자살 시도, 그리고 실패.
모두가 아가씨의 곁을 떠나고
오직 아가씨의 호위기사인 헤이든만이 곁을 지키고 있다.

‘헤이든, 그거 알아? 흔히 자살을 시도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은 생의 소중함을 알고 힘차게 살아간다고들 하지.’

‘…네, 다들 으레 그런 말을 하곤 하죠.’

‘그것은 남겨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야.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말이야,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죽음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사람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아, 오늘도 나의 주인께서는 죽음을 갈망하신다.

- 리디북스 발췌


남주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후작가 영애 아네스의 평민출신 호위기사로서,

자신의 연심을 감추고 그저 아네스의 곁을 지키는 헤이든.

 

자신의 목숨보다도 귀한 아가씨의 호위기사로서,

그가 지켜내야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닌

아가씨 자신으로부터 아가씨를 지켜내야 합니다.

 

태중에서부터 정해진 황태자와의 혼약을 위해

살아왔던 아가씨의 인생은,

단 한 발자국을 남긴 채 스러지고

그 때 부터 아가씨의 자살 시도가 이어졌기 때문이죠.

 

황태자가 발표한 평민 출신 여인과의 러브 스토리에

온 국민들은 열광하고, 

그 자리의 원주인이었던 아네스, 아가씨는 

귀족출신의 악역 영애로 전락해버립니다.

 

평생의 목표를 잃고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흔들리던 아네스는 황태자와의 혼약이 깨어지던 날,

결혼식 때 입으려고 준비해둔 새하얀 드레스를 찢어 목을 멥니다.

그것이 첫 번째 자살시도.

헤이든은 그렇게 죽음을 갈망하는 아가씨를

애타는 마음으로 붙잡고 싶지만.

 

그저...안타까워할 뿐.

자신의 위치와 신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헤이든은,

결국 생의 의지를 잃고 죽음만을 바라는 아가씨를

그저 바라보며 지켜냅니다.

 

그저 살아 있으시라 기도할 뿐.

그녀에게 그의 기도는 닿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로맨스 소설이니까.

두 주인공의 사랑으로 어떻게든 이 지독한 우울과 절망을

어떻게든 헤쳐나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버렸습니다. 

 

"나는 아가씨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아가씨를 구원하는 것만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네스에게 절망을 안겨준 황태자와의 파혼은 

그녀의 고고함, 자존감 나아가 존재 이유에 대한 말살이었고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잃은 그녀는 멈출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헤이든이기에,

그녀의 숱한 자살시도를 막아서면서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의 연심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녀에게 자신이 감히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우직하게, 고집스럽게 아가씨의 곁만을 지키는 호위기사와,

죽음을 갈망함에 있어 막아서는 이 없는 아가씨.

 

이 둘의 출구 없는 감정들은 작품의 피폐함을 더해갑니다. 


삶의 의지가 꺾인 채,

절망이라는 병에 잠식되어가는 아가씨에게 

헤이든이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면,

천한 출신의 호위기사와 귀족영애의 추문일지언정

아가씨는 좀더 살 의지를 갖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와 한계를 알고 있는 이에게는

그조차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던 일이겠죠.

 

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헤이든은

자신의 내면에 아가씨에 대한 열망을

단 한점 빠져나가지 못하게 꼭꼭 잠근 채

그저 우직하게 아가씨를 지킬 뿐입니다. 

 

아네스와 헤이든에게 선고된

죽음과 삶.

 

죽음을 원할 정도의 지독한 절망을

시련으로 던져준 신에 대한 원망,

이 세상에 대한 불공평함에 희망이 꺾인 이의

결론이 그의 죽음일 지언정,

 

남겨진 이들 또한 겪어내야 하는 상실의 고통으로

삶을 놓아버리고 싶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어가야만 하는 삶에 대해 이 작품은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증명이기에.

 

사랑하는 이의 흔적이 남겨진 이 세상에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하는,

그 슬프고도 잔인한 의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대상이 사라져도 사랑은 지속되니까.

이것 또한 로맨스라 할 수 있겠네요.

아주 슬픈. 


책장을 덮고나니 먹먹해졌습니다.

누구라도 필연히 겪을 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영영(永永)한 부재.

그 때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한번쯤은 생각할 가치가 있는,

저에게는 짧지만 제법 무거운 작품이었습니다.

 

조금 지난 뒤 다시한번, 좀 여러번..

헤이든과 아네스의 감정선을 따라 정독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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