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 여름. 일형.
재수 없는 부모 사이에서 살아남은 운 좋은 아이.
그게 나였다.
다 늙어서도 어린 손자새끼를 위해
물질을 놓지 못하는 할머니의 사랑에 기대어 무럭무럭 자랐다.
머리는 좀 나빴지만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태권도 도대표로 시합도 나갔고
상도 제법 탔다.
적당히 무료했지만 평온한 일상이었다.
체육관 근처 정육점집을 하던
서영오네 아버지가 찾아와 행패를 부렸을 때,
나는 왜 나를 싫어하던 그녀를 막아섰을까.
그녀, 서영오가 내게 입술을 붙여온 순간 알았다.
그녀는 나를 싫어했던게 아니구나.
"나 너 안 좋아해."
"...알아."
"나도 너 안 좋아해."
남자 보는 눈 하고는.
세상은 고아새끼한테 더 냉정했고,
나는 그런 세상에서 온전히 버텨내지 못했다.
그렇게,
내 유년시절의 짠기 가득한 해동과 너는
이제 더이상 만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고작 나 좋다는 계집애 하나 떼어 냈을 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지 알 수 없었다.
26살 가을. 영오.
네가 사라진 세상을 하나 변한게 없다.
너를 범죄자라 매도했던 사람들은 승승장구했고,
너만이 사라졌어.
나는 아직도 후회해.
너를 지켜보지만 말 것을.
옆에서 함께 악다구니라도 쓸것을.
그랬다면 너는 손에 흉터 하나 없이
예의 그 티없는 웃음을 짓고 있겠지.
힘든 고학생이었던 내게
자꾸만 작위적인 행운이 다가 오는 것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을만큼 힘들었던 내 젊은 날,
거짓말 처럼 너를 다시 만났다.
포기와 체념은 내 전문분야였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노력해도 놓을 수 없는 게 있었다.
해동. 겨울.
"오랜만이야. 누나."
나를 말랑하게, 자꾸만 잘 살게 만드는 따뜻함이 싫다.
자꾸만 나 스스로를 쪽팔리게 만드는 서영오.
그런데 뒈지기 직전엔 왜 자꾸 네가 보고 싶은건지.
13년 전이나 7년 전이나,
바보 같은 서영오가 내게서 떨어지길 바라서
그 지랄을 떨었었다.
지금이라도 바라는 대로 됐으니 잘된 일인데,
왜 이렇게 기분은 엿같은 건지.
영오와 일형.
오랜시간 돌고돌았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는 그 순간들이
그 때 그들의 시점으로 그려져서
더더욱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어린 고아에게
과분한 사랑을 나눠주던 해동 사람들에게,
바보같이 자신을 사랑한 영오에게
제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도망쳐버린 일형..
팍팍하고 빈곤한 현실에도
그렇게 놓쳐버린 첫사랑을 잊지 못해
그를 찾아 헤맸던 영오...
한결같았던 영오의 사랑은
어김없이 겨울을 함락시키는 봄이 되어
일형의 차가운 세상을 녹입니다.
일형은 그의 인생의
단 하나, 봄과 같았던 존재였던 영오를
나같은 쓰레기와 엮이지 말라고 밀어냈지만,
일형을 몰랐나봅니다.
영오에게도 일형은 봄이었던 것을.
작가님의 후기에 씌여진
"네가 봄이라는 걸
너만 모른다"
는 일형이에게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형아, 너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
걱정없이 해동에서 영오랑 행복해.
라고 말해주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백만수르 백만수관장님,
영오 정육점 공해숙 여사님,
영오 동생 지오.
그리고
신빨 떨어진 이보살님.
(화합부적 나이스!)
막무가내로 행선지 변경해버리는
수다쟁이 황택시기사님.
그리고...해동의 여러 이웃들.
이들이 있기에
일형은 해동에서 영오랑 더욱 행복하게 살겠죠.
외로웠던 지난날 다 잊고
일형이가 행복하길 그저 바랍니다.
일형이의 여자친구였던 말자씨의 명언 하나 남깁니다.
"좆같은 일이 있으면, 꿈 같은 일도 있는거제.
그러니까 다들 뒈지지 않고 악착같이 사는 거 아니겄어."
"그놈 한테는 네가 꿈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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