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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차연.

제문 그룹의 오만하고 겁없던 미친개.
그리고 그림자처럼 내게 따라붙는 오명.
서출. 혼외자.
그 오명을 입에 담은 녀석을 반쯤 죽이고
유배처럼 내려온 가일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진짜 지랄이네 저거."
겁도 없이 대드는 게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악에 받쳐 이마에 핏줄까지 세운 여자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서라.

"얼굴값 잘하게 생겼네."
"싹수도 없어 보이고."


온 동네 남자들의 눈요깃거리가 되고
바보가 된 아버지를 봉양하며 구질구질하게 사는
얼굴만 예쁘장한 깡마른 여자애.

이 심심한 동네에서 나의 유일한 놀잇감이 된 그녀.
부표처럼 흔들리는 너의 인생에 내 구미가 당겼다.

그 여자애,
이서라의 인생은 충분히 지옥이었고,
나는 그녀의 인생을 조금쯤은
구원해 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열여덟의 치기는 오만했지만 또한 무력했다.

내 앞에서 간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 눈을 모를리 없다.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았다.

"간다."

고작 반년 간의 유희였고,
서울로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서는
조금씩 그애를 잊었다.
그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감정은 무엇일까..

혼외자를 낳고 이 지옥같은 가일로 도망쳤던

나의 어머니처럼 이서라가 살지 않길 바랬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뿐이어야 했는데..

그렇게 지난 세월이 13년.
나는 치기어렸던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다.
삶은 언제나처럼 무료했고,
그녀에게 가졌던 죄책감은 조금씩 희석되는 것 같았다.
그녀, 이서라를 운명처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아직도 너를 잊지 못했고
아직도 너의 불행을 바란다.

"진심이야. 네가 뭘 하든 잘됐으면 좋겠어.
그러면서도 항상 불행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이서라 네가 날 찾을테니까.
내가 너의 구원이 될테니까.
너는 나 없으면 안되니까.


이서라.

나고 자란 곳이지만 지긋지긋한 가일이 싫었다.
바보가 된 아버지를 데리고 도심으로 나갈거야.
그곳에서 다 잊고 보란듯이 살거야.

그런 다짐만이 이 지옥을 버티게 했다.
나는 고작 18살이고 할 수 있는 건 단순한 아르바이트.
나를 짓누르는 돈. 빚. 가족.
동네 아저씨나 동창 남자애의 음흉한 눈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 눈빛을 알고도 나는 그들에게
싫은 내색을 할 수 없다.
나는 힘도 돈도 없으니까.
이렇게 불쌍한 내 삶은
동네사람들의 좋은 안줏거리

혹은 놀잇감이 되었다.
죽은 듯이 살면 언젠가는...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난 남자애가

자꾸 내 삶을 흔든다.

신차연.

유희거리로 나를 도와준다지만,
어차피 너는 금방 갈거잖아.
니가 가고 나면 나는..
네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반작용을
그대로 뒤집어 쓸텐데.
왜 내 인생을 힘들게 해.
왜 날 신경써..

"정말 그 애에게 온 마음,
영혼을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전히 그녀가 마을 사람들의 홀대를 받는 게
싫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신차연을,
서라는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첫사랑이었다."


결국 나는 너를 마음에 담았고, 너는 떠났다.
내 말이 맞았잖아.
너는 그렇게 훌쩍 가버리고 나는 혼자 남았다.
그렇게 13년.
나는 그럭저럭 살고 있어.
처음에는 널 원망했지만
내 앞에 놓인 삶은 녹록치 않아서
널 잊어가더라.

우리 그렇게 그냥 서로에게 잊혀지자.
그게 맞아. 맞는데..


이 작품은 한 사건에 대해서
남주, 여주의 시점이 번갈아 나와
조금 지루한 감이 있지만,
그만큼 그들의 심리나 상황이
세밀하게 그려집니다.

또한 작가님이 의도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흔히 볼 수 없던 단어들을 사용해서
이야기의 흐름을 조금 더 거북하고
낯설게 만들었던 것도
역시 좋았습니다.

차연이 죄책감이라 치부했던 감정들,
그리고 풋정이라 생각해 눌러뒀지만
사실은 그의 황폐한 내면에 단 하나 뿐이었던 사랑.
이서라를 지키고자
그의 방식으로 아등바등하는 모습,

다 가졌지만 정작 그 손에는 아무것도 없던
차연에게 서라가 전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과정들,
그 내밀한 심리묘사가 참 인상깊었습니다.

차연은 그녀를 소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그녀의 주변을 점점 옭죄어가는 광기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역시 번뇌하고 고민합니다.

아직도 자신은 손에 제대로 쥔 것 없는
재벌가의 혼외자일 뿐.
서라를 지키고 싶지만
자꾸만 외부의 압력에 이지러지는 상황에
괴로워하면서도 서라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않습니다.

"...나 때문이야?"
"맞아 너 때문이야."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에게
심리적으로 부채감을 지우고
가스라이팅을 일삼지만
그역시 서서히 망가져갑니다.
(아니, 이미 망가졌는지도 모르죠.
서라에게 가진 감정의 실체조차
제대로 알아 챌 수 없어서
13년이나 서라를 놓쳤던 녀석이니까요.)

서라역시 점점 그에게 길들여져가면서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지만
초반에 그와 재회했을 때는
제법 단호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차연을
밀어내고 밀어내고..

그 과정에서 서라를 놔두고 떠난
차연이 꼴좋다하면서
살짝 시원한 사이다를 한모금 마신뒤,
둘이 연애(!)를 하면서 먹었던
달달한 사탕이 녹기도 전에
시작되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그들의 상황 전개와
서라를 향한 차연의 가스라이팅에
드디어 피폐물의 진면목이 시작되는구나!
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저는 오히려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둘의 관계와
서라가 망가져가면서 차연역시
내면이 무너지는 그 과정이 담겼던
후반부가 너무 좋았습니다.

거기에 차연이 완벽한 재벌집 자제가 아니라서
더더욱 좋았습니다!
항상 그의 자리를 위태로워하고,
그에게 주어진 일들을 힘들어하고
그러면서도 서라를 위해서라면
진창에 빠져도 기꺼워하는 차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요.

내면이 망가진 녀석의 사랑은
안타깝지만 그역시 망가질 수 밖에 없는거죠.
그런 사랑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런 사랑은 하고싶지 않지만..)
시간을 더 들여서 아껴봤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대로 그가 가일에 남았다면,
10여년의 공백 없이
서라의 곁을 좀더 빨리 지켰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신차연은 미친놈이니까
결론은 뭐, 서라를 자신만 보게 하는 과정이
비슷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서라는 조금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서라 시점에서는 메리배드엔딩,
차연의 시점에서는 베리해피엔딩이었던
"차연은 놀잇감을 사랑한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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